
김연수의 「동욱」을 처음 읽으면 청소년 범죄를 다룬 소설처럼 보인다. 중학생 동욱은 사람이 죽은 화재사건과 연결되고, 경찰과 언론의 시선 속에서 ‘방화범’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사건의 진실을 궁금해한다. 정말 동욱이 불을 질렀을까.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 무엇이 한 아이를 그런 행동으로 밀어 넣었을까.
그런데 조금 더 읽으면 이 소설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질문이 달라진다. 관심은 ‘누가 불을 질렀는가’에서 ‘우리는 동욱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로 옮겨간다. 그리고 다시 ‘그 아이가 서 있던 곳은 어떤 세계였는가’라는 질문으로 확장된다. 한 아이의 범죄처럼 보였던 사건 뒤로 빈집과 죽음, 재개발과 사라지는 장소들이 겹쳐진다.
그래서 「동욱」은 사회문제를 소설로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작가는 현실의 고통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가. 아니면 판단을 유보하고 인물을 바라봐야 하는가. 김연수는 그 사이에서 아주 조심스러운 거리를 선택한다.
청소년 범죄를 이야기하면서 왜 범죄의 원인을 설명하지 않는가
사회문제를 다루는 이야기는 쉽게 원인을 찾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청소년이 범죄를 저질렀다면 가정환경을 살피고, 학교생활을 조사하고, 주변 어른의 책임을 묻는다. 그것은 현실의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하지만 소설이 똑같은 방식으로 움직인다면 한 인간은 어느 순간 몇 개의 원인으로 설명되는 사례가 되어 버릴 수 있다.
「동욱」에서 김연수는 그 길을 경계한다. 동욱의 담임인 ‘나’가 사건을 따라가지만 동욱의 내면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경찰과 언론은 사건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있다. 방화, 범죄, 문제 청소년 같은 단어를 붙이는 순간 복잡했던 사건은 이해하기 쉬운 형태가 된다. 그러나 그 이름들이 과연 동욱이라는 한 인간을 설명할 수 있을까.
작품은 그 질문에 선뜻 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가 동욱을 이해했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 이해 바깥에 무엇인가가 남아 있음을 보여 준다. 동욱이 왜 그 장소에 있었는지,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의 행동을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작가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가가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어서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반대다. 한 사람의 삶을 사회문제의 증거로 사용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침묵한다. 사회문제를 다루는 소설에서 침묵은 회피가 아니라 때로는 윤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동욱」은 보여 준다.
‘방화범 동욱’이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을 만나면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붙이면 불안이 줄어든다. ‘문제아’, ‘비행청소년’, ‘방화범’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 단어 안에 한 사람을 넣어 두면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소설은 그 반대의 일을 할 수 있다.
쉽게 붙여진 이름을 떼어 내고 그 뒤에 가려진 한 사람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것.
「동욱」에서 중요한 것은 동욱이 아무런 잘못도 없는 순수한 피해자라는 식의 역전이 아니다. 그렇게 읽으면 작품은 또 다른 단순화에 빠진다. 악한 아이를 불쌍한 아이로 바꾸었을 뿐, 여전히 한 인간을 하나의 이름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김연수는 동욱을 변호하는 대신 동욱을 알기 어렵게 만든다.
이 선택은 상당히 중요하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며 누가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고 싶어 한다. 특히 범죄가 등장하면 그 욕망은 더 강해진다. 그런데 작가는 판단에 필요한 정보를 모두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면 독자는 불편해진다. 내가 이 아이를 비난해도 되는가. 반대로 내가 이 아이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불편함이 바로 「동욱」이 독자에게 남기는 자리다.
소설은 독자에게 동욱을 이해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한 인간을 너무 빨리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되묻게 한다. 사회적 사건을 다루는 소설이 현실을 단순화하지 않으려면 바로 이런 불편함을 견뎌야 하는지도 모른다.
한 아이의 사건 뒤에서 폐허와 재개발이 보이기 시작한다
「동욱」을 청소년 방화사건의 이야기로만 읽으면 소설 속 공간이 충분히 보이지 않는다. 동욱의 사건 뒤에는 빈집과 폐허, 재개발이라는 또 하나의 서사가 놓여 있다. 작품을 용산참사의 기억과 연결해 읽은 비평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울문화재단 웹진 《비유》의 독해 역시 작품 속 불길과 폐허, 뉴타운의 이미지를 통해 용산이라는 실제 공간과 사회적 기억을 환기한다.
여기서 소설의 질문은 크게 확장된다.
처음에는 ‘한 아이가 왜 불을 질렀는가’를 묻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점차 ‘그 아이가 서 있던 장소는 왜 폐허가 되었는가’, ‘그곳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사람이 죽은 자리에 새로운 도시가 세워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이 겹쳐진다.
개인의 사건과 사회의 사건이 포개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김연수가 동욱을 사회구조의 희생자로 간단히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 역시 한 사람을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개인과 사회 사이에 인과관계를 곧바로 그어 버리는 대신 두 장면을 나란히 놓는다. 동욱의 삶과 폐허가 된 도시가 같은 화면 안에 들어오도록 한다.
그래서 독자는 스스로 연결해야 한다.
동욱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 정말 개인만의 문제였을까.
이 질문이 생기는 순간 「동욱」은 청소년 범죄소설의 외형을 벗어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풍경을 바라보는 소설로 넓어진다.
사회문제를 다룬다고 작가의 목소리가 커질 필요는 없다
사회적 참사를 소재로 삼는 순간 작가는 어려운 문제와 마주한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해 보이고,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실제 고통을 작품을 위한 감정적 재료로 소비할 위험이 있다.
김연수는 「동욱」에서 어느 쪽도 쉽게 선택하지 않는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사건의 크기와 문장의 목소리가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이 죽고, 불이 나고, 한 아이가 범죄자로 지목되고, 그 뒤로 재개발과 사회적 죽음의 기억까지 겹쳐지지만 서술은 격렬하게 독자를 몰아붙이지 않는다.
작가가 “분노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으니 독자가 사건을 바라볼 시간이 생긴다.
이것은 냉정함과는 다르다.
오히려 작가가 감정을 먼저 결정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자신의 감정을 작품 안에서 발견해야 한다. 분노할 수도 있고, 안타까워할 수도 있으며, 동욱을 이해하지 못해 답답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이 작가가 넣어 준 정답이 아니라 독자가 사건과 인물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동욱」에서 김연수의 태도를 ‘중립’이라고 부르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그는 아무 입장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무 쉽게 누군가의 삶을 대신 설명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뜨거운 사건을 차갑게 쓰는 이유
「동욱」을 읽으며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되는 것은 온도다.
작품의 사건은 뜨겁다. 불이 있고 죽음이 있으며 청소년 범죄와 재개발이라는 사회적 문제가 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문장은 사건만큼 뜨거워지지 않는다.
나는 이 온도차가 작품의 중요한 미학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사건보다 더 뜨거워지면 독자는 작가의 분노를 따라가게 된다. 반대로 작가가 한발 물러서면 사건 자체를 바라보게 된다. 김연수는 후자를 선택한다. 그래서 독자는 불을 보면서도 동시에 불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누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누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사람들은 왜 서로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상대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불’도 단순한 방화사건의 불에 머물지 않는다. 폐허와 죽음의 기억을 지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의미가 확장될 여지가 생긴다. 이 문제는 뒤에서 별도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술의 낮은 온도가 사건의 온도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선명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작가가 대신 울어 주지 않기 때문에 독자가 울어야 하고, 작가가 대신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가 판단의 어려움을 떠안게 된다.
사회적 사건을 문학으로 옮길 때 필요한 거리란 어쩌면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생각|타인의 고통을 쓰면서 내가 너무 많이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동욱」을 읽으며 창작자로서 가장 오래 남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나는 인물을 너무 쉽게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는 이상한 권력이 있다. 인물의 과거를 알고, 상처의 원인을 알고, 어떤 행동을 왜 했는지도 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독자에게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이 아이는 이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한 문장이면 인생 하나가 설명된다.
하지만 실제 사람의 삶도 그렇게 설명할 수 있을까.
「동욱」은 오히려 설명을 멈추는 쪽을 선택한다. 동욱의 마음속에 들어가 모든 이유를 보여 주지 않고, 관찰자인 ‘나’가 볼 수 있는 만큼만 보여 준다. 그래서 독자는 동욱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도 끝내 그 아이를 완전히 가질 수 없다.
나는 그것이 이 작품이 타인을 대하는 예의라고 생각한다.
사회문제를 소설로 쓴다고 해서 반드시 큰 목소리를 낼 필요는 없다. 작가가 해야 할 일은 정답을 먼저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쉽게 지나쳤던 한 사람 앞에서 조금 더 오래 머물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동욱」을 읽고 창작 노트에 한 문장을 적는다면 이것을 적고 싶다.
타인의 고통을 쓸 때 가장 먼저 의심해야 할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이미 이해했다고 믿는 나의 확신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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