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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서평

이장욱<절반 이상의 하루오>분석 / 하루오는 어떤 인물인가

by 들꽃 2026. 8. 13.

들어가는 말

이장욱의 「절반 이상의 하루오」를 읽고 나면 이상하게 하루오라는 인물이 오래 남는다. 아주 극적인 사건을 일으키는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속마음을 길게 털어놓는 인물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일본에 있을 때는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고 지내다가 어느 순간 훌쩍 여행을 떠나고, 여행지에 도착해서도 유명한 관광지를 찾아다니기보다 그곳에서 그냥 살아가는 것처럼 시간을 보낸다.

처음에는 하루오를 조금 특이한 여행자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작품을 끝까지 읽고 나면 하루오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하루오가 어디를 여행했느냐가 아니라 ‘나’가 하루오를 어떻게 바라보았고, 그를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시간이 흐른 뒤 왜 자신의 삶에서 다시 하루오를 발견하게 되는가에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사용한다. 독자는 하루오의 마음속으로 직접 들어갈 수 없고 오직 ‘나’가 보고 듣고 기억하는 하루오만 만난다. 그래서 가까이 여행하면서도 하루오는 계속 알 수 없는 부분을 남긴다. 바로 그 거리 때문에 하루오라는 인물은 오히려 더 궁금해진다. 강의자료 역시 이 작품을 읽을 때 1인칭 관찰자 시점의 거리감과 밀착감, 인물의 캐릭터와 관계, 여행과 인생의 의미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제시한다.

그렇다면 하루오는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작가는 왜 그를 모두 설명하지 않은 채 ‘나’의 시선 속에 놓아두었을까.

이장욱 소설집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책 표지
이장욱 소설집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의 표지. 황갈색 바탕 위로 빛처럼 뻗어 나가는 도형과 원이 배치되어 있다.


이장욱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수록작 「절반 이상의 하루오」 속표지
이장욱 소설집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수록된 단편 「절반 이상의 하루오」의 속표지. 어두운 바탕에 원과 사선 형태가 겹쳐져 있다.

 

2. 1인칭 관찰자 시점, 가까이 있지만 다 알 수 없는 사람

「절반 이상의 하루오」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하루오가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소설은 ‘나’의 시선을 통해 하루오를 보여준다. ‘나’는 하루오와 여행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가까워지지만, 하루오의 마음속까지 직접 들어가지는 못한다.

이것이 1인칭 관찰자 시점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효과다.

하루오와 ‘나’의 첫 만남부터 조금 특별하다. 하루오는 숙소에서 청소를 하다가 제지당하자 자신은 왜 청소하면 안 되느냐고 묻는다. 직원이 아니라 승객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듣자 하루오는 오히려 “친구가 되도록 합시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루오는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강의자료에서도 하루오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오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스며들었다”고 설명한다. 처음부터 함께 여행을 떠난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 장면만 보면 ‘나’와 하루오 사이에는 별다른 거리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소설을 읽어갈수록 이상한 점이 생긴다. 물리적으로는 가까워졌는데 하루오라는 사람을 완전히 알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가까이 갈수록 하루오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생긴다.

강의자료에는 하루오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때로는 하루오 자신이 이미 하루오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대목이 제시되어 있다. ‘나’의 눈앞에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이면서도 하나의 성격이나 정체성으로 쉽게 붙잡히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1인칭 관찰자 시점의 밀착감과 거리감이 동시에 만들어진다.

‘나’가 하루오와 함께 있기 때문에 독자는 그를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하루오가 어떻게 말하고 웃는지, 여행지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볼 수 있다. 이것이 밀착감이다.

반면 독자는 하루오의 내면을 직접 알 수 없다. 하루오가 왜 그렇게 살아가는지, 왜 한곳에 머물지 않는지, 다른 사람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지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는 ‘나’가 본 만큼만 하루오를 알 수 있다. 이것이 거리감이다.

이 거리감은 작품의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하루오라는 인물을 살아 있게 만드는 장치다.

현실에서도 우리는 가까운 사람을 모두 알지 못한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도 모르는 부분이 있고, 어떤 사람은 헤어진 뒤에야 비로소 이해되기도 한다. 이장욱은 하루오의 마음을 모두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실제 사람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경험을 독자에게 준다.

특히 ‘나’와 그녀, 하루오의 관계가 변하면서 이 효과는 더 분명해진다. 어느 순간 ‘나’는 어둠 속에서 하루오와 그녀가 나란히 앉아 손을 잡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본다. 두 사람은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자연스럽게 보인다. 이 장면에서 ‘나’는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이 된다.

하루오와 함께 여행하고 있지만 하루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지는 못한다. 바로 이 틈에서 하루오는 더 이상 ‘나’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하루오만은 아니게 된다.

그래서 이 작품의 1인칭 관찰자 시점은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시점이 아니다.

한 사람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갈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의 전부를 가질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거리 때문에 제목의 ‘절반 이상’이라는 말도 조금씩 의미를 얻기 시작한다.


3. 하루오는 관계 속에서 어떻게 달라지는가

소설 속 인물은 혼자 있을 때보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절반 이상의 하루오」에서도 하루오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지만, ‘나’와 그녀의 관계 속에 놓아보면 그의 캐릭터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먼저 ‘나’와 그녀부터 서로 다른 사람이다.

강의자료에 따르면 그녀는 외국 생활에 익숙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당시 ‘나’는 추리닝을 입고 토익책을 끼고 사는 취업 준비생이다.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이 꿈꾸었던 삶과 실제 살아가는 삶이 서로 어긋난다는 점이다. ‘나’는 파일럿을 꿈꿨지만 사무직원이 되고, 안정된 공무원을 꿈꾸었던 그녀는 오히려 하늘을 오가는 승무원이 된다.

이 어긋남은 하루오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하루오는 애초부터 한곳에 정착해 정해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일본에 있을 때보다 일본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고, 여행지에서는 관광객처럼 행동하지 않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처럼 지낸다.

처음에는 이런 하루오가 ‘나’와 아주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데 관계가 이어지면서 하루오의 모습은 ‘나’에게 조금씩 스며든다. 강의자료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하루오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스며들었다”는 표현이다.

‘스며든다’는 것은 강제로 상대를 변화시키는 것과 다르다. 처음에는 변화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새 이전과 다른 상태가 되어 있다.

하루오와 ‘나’의 관계도 그렇다.

여행이 끝나고 두 사람이 헤어진 뒤 오히려 하루오의 영향이 분명해진다. ‘나’의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않고, 자꾸 집 밖으로 돌게 된다. 그러면서 ‘나’는 절반 이상의 자신이 어디 다른 곳에서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바로 여기에서 하루오는 다시 나타난다.

실제로 하루오가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하루오의 삶의 방식이 ‘나’의 삶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하루오의 떠돎과 머물지 못함을 이제 ‘나’ 자신이 살아내기 시작한다. ‘나’는 하루오를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루오의 웃음을 흉내 내기도 한다. 강의자료는 이러한 과정을 여행이 끝난 뒤 삶 속에서 하루오를 발견해가는 과정이라고 정리한다.

이 점에서 하루오라는 인물의 역할이 흥미롭다.

하루오는 ‘나’에게 어떤 교훈을 가르쳐주는 인물이 아니다. 무엇이 옳은 삶인지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기 방식대로 살아갈 뿐이다.

그런데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이 ‘나’에게 남는다.

시간이 지나 자신의 삶이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비로소 과거에 만났던 하루오를 자신의 삶을 통해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하루오는 작품 속에서 타인이면서 동시에 ‘나’의 또 다른 가능성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저 사람은 나와 다르다’고 생각했던 존재가 어느 순간 자신의 모습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이것이 이 소설에서 관계가 흥미로운 이유다.

관계는 반드시 두 사람이 계속 함께 있어야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떠난 뒤 더 오래 남는다. 함께 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말과 행동이 몇 년이 지난 뒤 자신의 삶과 겹치면서 갑자기 이해되기도 한다.

어쩌면 하루오와 ‘나’의 관계가 보여주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가 만난 사람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와 다른 모습으로 계속 살아간다.

그리고 이제 작품은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질문으로 넘어간다.

하루오가 끊임없이 떠났던 여행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일이었을까. 아니면 한곳에 완전히 머물 수 없는 인간의 삶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었을까.


4. 여행은 장소를 옮기는 일이 아니라 삶이 달라지는 순간이다

「절반 이상의 하루오」에서 여행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하루오라는 인물을 만들고, ‘나’와 그녀의 삶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장치다.

하루오의 여행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여행과 조금 다르다. 그는 낯선 곳에 도착해서 새로운 풍경이나 관광지를 찾아다니는 사람이 아니다. 타임스퀘어에서는 뉴요커처럼, 치앙콩에서는 그곳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처럼 지낸다. 그래서 ‘나’는 하루오가 여행을 한다기보다 그곳에서 ‘살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일반적인 여행에는 출발점과 목적지, 그리고 돌아올 곳이 있다. 하지만 하루오에게 여행과 일상의 경계는 흐릿하다. 일본에 있는 시간이 오히려 잠시 멈춰 있는 시간처럼 보이고, 다른 나라에 있을 때 비로소 삶이 움직인다.

그렇다고 작품이 여행을 무조건 자유롭고 낭만적인 것으로 그리는 것은 아니다.

강의자료에는 하루오가 찬 공기가 흐르는 거리를 걷다가 죽고 싶었던 마음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이 제시된다. 하루오는 그것을 자신이라는 존재가 “5센티미터쯤 다른 세계로 옮겨진 것 같은” 순간으로 받아들인다.

이 표현이 인상적이다.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는 데 반드시 거대한 사건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아주 조금 자리를 옮겼을 뿐인데 세상이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여행은 하루오에게 바로 그런 미세한 이동을 가능하게 한다.

그녀의 여행도 다르지 않다. 승무원 일을 그만두고 한국과 이별하는 그녀는 자신의 삶을 두고 아주 길고 끝나지 않는 여행을 하게 된 셈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여행은 더 이상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로 가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직업을 바꾸는 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일, 결혼하고 다시 관계가 흔들리는 일, 익숙한 삶에서 벗어나는 일도 모두 여행의 일부가 된다.

‘나’ 역시 처음에는 하루오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파일럿을 꿈꾸었지만 사무직원이 되고, 안정된 일상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결혼생활이 흔들리면서 자꾸 밖으로 돌게 되고, 자신의 절반 이상이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 순간 여행은 하루오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하루오가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었다면 ‘나’는 자신의 삶 안에서 경계를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여행은 관광이나 이동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이 이전의 자신과 조금 달라지는 과정이라고 읽을 수 있다.

작품 마지막에 ‘나’가 갑자기 인터넷에 접속해 인도행 비행기표를 구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나’는 하루오의 여행 이야기를 기억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직접 떠나는 사람이 된다. 강의자료 역시 이 부분을 “하루오의 발견을 넘어 ‘나’가 하루오가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정리한다.

결국 여행은 하루오를 설명하는 소재이면서 동시에 ‘나’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사건이다.

어쩌면 우리 인생에도 그런 여행이 있는지 모른다. 그때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만남과 장소가 시간이 흐른 뒤 전혀 다른 의미로 돌아오는 순간 말이다.


5. 이장욱은 하루오를 무엇으로 보여주는가

이 작품을 창작의 관점에서 읽으면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작가가 하루오를 직접 설명하는 대신 여러 행동과 관계를 통해 보여준다는 점이다.

하루오를 가장 먼저 보여주는 것은 여행이다.

일본에 있을 때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어느 순간 다른 나라로 떠나고, 여행지에서는 관광객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처럼 지낸다. 이런 반복되는 행동만으로도 독자는 하루오가 한곳에 정착해 살아가는 보통의 인물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두 번째는 청소다.

하루오와 ‘나’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도 청소가 등장한다. 하루오는 자신이 승객인데도 자연스럽게 청소를 한다. 직원이 청소할 필요가 없다고 하자 오히려 친구가 되자고 말한다.

처음에는 조금 특이한 행동처럼 지나갈 수 있다.

그런데 작품 마지막에 청소가 다시 등장한다.

이제 청소하는 사람은 하루오가 아니라 ‘나’다. ‘나’는 자신이 어느 곳에 도착해 문득 몸을 일으켜 청소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누군가 하루오를 아느냐고 묻는다면 빙긋 웃으며 대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반 이상의 하루오라면. 아마도.”

처음과 마지막의 청소가 이렇게 연결되면서 하나의 평범한 행동이 인물의 변화를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나’는 하루오의 삶을 이해했다고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하루오가 했던 행동을 자신도 하게 된다.

이것이 훨씬 강하다.

소설에서 인물의 변화를 반드시 심리 설명으로 알려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세 번째 매개는 하루오의 웃음이다.

여행이 끝난 뒤 ‘나’는 하루오의 ‘빙긋’ 하는 웃음을 흉내 내보려고 한다. 잘 되지는 않는다.

이 장면도 작지만 의미가 있다.

누군가의 말이나 사상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표정 하나를 따라 해보는 행동 속에 그 사람을 향한 기억과 동경,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이장욱은 하루오를 설명하기 위해 거창한 상징을 앞세우지 않는다.

여행하고, 머물고, 청소하고, 웃는 행동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작품 후반에는 그 행동을 ‘나’에게 옮겨 놓는다.

이것이 「절반 이상의 하루오」에서 인물을 만드는 흥미로운 방식이다.

처음에는 하루오의 행동이었지만 마지막에는 ‘나’의 행동이 된다. 한 인물의 캐릭터를 보여주던 작은 행동이 다른 인물의 변화를 보여주는 장치로 바뀌는 것이다.

작가 지망생의 입장에서 이 작품에서 배울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인물을 설명하기보다 반복되는 행동 하나를 만들어 주는 것. 그리고 그 행동이 관계와 사건을 거치면서 다른 의미를 갖게 하는 것.

그렇게 하면 인물은 작가의 설명보다 독자의 기억 속에서 더 오래 살아남는다.


6. 왜 ‘절반 이상의 하루오’일까

이제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 보게 된다.

왜 「하루오」가 아니라 **「절반 이상의 하루오」**일까.

작품 속에는 “절반 이상의 하루오는 어딘지 다른 하루오이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하루오는 한 가지 모습으로 고정해서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장소에 따라 다른 사람처럼 살아가고, 때로는 하루오 자신이 이미 하루오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작품 후반으로 갈수록 ‘절반 이상’이라는 말은 하루오에게만 해당하지 않게 된다.

결혼생활이 흔들린 ‘나’ 역시 자신의 절반 이상이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것 같다고 느낀다. 하루오에게서 보았던 삶의 방식이 어느새 자신의 삶에도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제목은 한 인물의 이름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더 넓은 질문을 품게 된다.

사람에게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만 있는 것일까.

한 사람을 오래 알고 지냈다고 해서 그의 전부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의 나는 언제까지 지금의 나로 남아 있을까.

이 소설은 그 질문에 분명한 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마지막에 ‘나’를 하루오와 닮은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나’는 인도행 비행기표를 사고, 언젠가 하루오처럼 청소를 하며 누군가를 만나는 자신을 상상한다. 그리고 하루오를 아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반 이상의 하루오라면. 아마도.”

이 말에는 묘한 여운이 있다.

하루오를 완전히 안다는 뜻도 아니고 모른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하루오와 함께했던 시간이 자신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대답처럼 들린다.

처음에는 ‘나’가 하루오를 관찰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면 하루오를 바라보던 ‘나’ 자신에게 하루오의 모습이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하루오는 한 명의 독특한 여행자로만 남지 않는다.

한때 만났던 사람이 시간이 흐른 뒤 내 삶 속에서 다시 발견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는 일이 결국 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나는 그것이 「절반 이상의 하루오」라는 제목이 오래 남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창작자의 독서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하루오의 특별한 여행 경력보다 이장욱이 하루오를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작가는 하루오의 마음을 모두 해설하지 않는다. ‘나’라는 관찰자를 세워 가까이 따라가게 하면서도 하루오의 일부는 끝까지 남겨둔다. 그리고 여행, 청소, 웃음 같은 작은 행동을 반복해 인물을 조금씩 완성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한 인물의 행동이 다른 인물에게 옮겨가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하루오가 청소했다. 마지막에는 ‘나’가 청소한다.

그 사이에 긴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 작은 변화만으로도 독자는 하루오가 ‘나’에게 얼마나 깊이 스며들었는지 알게 된다.

소설을 쓸 때 나 역시 인물의 성격을 먼저 설명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외로운 아이였다’,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다’, ‘자유를 원하는 사람이었다’라고 써버리는 것은 쉽다.

하지만 좋은 소설은 그 말을 하지않고, 독자가 그렇게 느끼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절반 이상의 하루오」는 내게 인물은 설명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관계, 그리고 반복되는 작은 장면 속에서 살아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