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서평23

조해진 빛의 호위|사람은 어떻게 서로의 삶을 비추는가 들어가는 말 / 우리는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기억하며 살아간다조해진 작가의 소설을 읽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삶은 정말 혼자만의 것일까. 우리는 흔히 인생을 자신의 선택과 경험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조해진 작가의 소설 속 인물들은 조금 다른 삶을 살아간다. 누군가의 작은 친절을 오래 기억하고, 오래전 스쳐 지나간 한 사람의 말 한마디를 가슴에 품은 채 살아간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또 다른 사람의 삶에 작은 흔적을 남긴다.그래서 조해진 작가의 소설에는 영웅이 없다. 세상을 뒤집는 거대한 사건도 없다. 대신 이름 없는 사람들이 서로를 기억하고, 잊지 않으며, 때로는 아주 조용하게 한 사람의 삶을 지탱해 주는 순간들이 있다. 그 조용한 연결이 모여 한 편.. 2026. 7. 25.
앨리스 먼로 『거지 소녀』②|좋은 소설은 시간을 어떻게 기억으로 바꾸는가 들어가는 말|시간은 사라지지만 기억은 이야기가 된다 사람은 시간을 순서대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몇 년을 함께 보낸 일보다 단 하루의 풍경이 더 오래 남기도하고, 오래전 들었던 한마디가 수십 년이 지나도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기도 합니다. 우리의 기억은 연대기가 아니라, 삶을 바꾸었던 몇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앨리스 먼로는 이 기억의 방식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 작가입니다. 『거지 소녀』 연작 가운데 「장엄한 매질」과 「스펠링」은 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작품입니다. 한 편은 어린 로즈가 폭력과 사랑이 뒤섞인 세계를 처음 배우는 이야기이고, 다른 한 편은 늙고 쇠락한 플로를 돌보며 같은 세계를 다시 바라보는 이야기입니다. 두 작품 사이에는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르지만, 먼로는 그 시간을 거의 .. 2026. 7. 24.
앨리스 먼로 『거지 소녀』①|평범한 삶은 어떻게 위대한 소설이 되는가 들어가는 말 / 왜 우리는 로즈를 오래 기억하게 될까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라고 해서 모두 어렵거나 거대한 사건을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앨리스 먼로의 소설은 놀라울 만큼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출발합니다. 작은 마을에서 자란 한 소녀, 가족 사이의 불편한 침묵, 오래전 지나간 수치심, 차마 다 말하지 못한 사랑과 미움. 다른 작가였다면 몇 줄로 지나쳤을 일상이 먼로의 소설에서는 한 사람의 인생을 이루는 결정적인 순간이 됩니다.그래서 처음 『거지 소녀』를 읽으면 다소 의아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눈을 사로잡는 극적인 사건이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줄거리로 빠르게 달려가는 장편도 아닙니다. 서로 다른 단편들이 흩어져 있을 뿐인데, 책장을 덮고 나면 마치 로즈라는 한 사람의 삶 전체를 오랫동.. 2026. 7. 23.
김애란 『바깥은 여름』|〈입동〉은 왜 집 안에서 상실을 바라보는가 들어가는 말 / 아이를 잃은 뒤에도 집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김애란의 단편소설 **〈입동〉**은 "자정 넘어 아내가 도배를 하자 했다."라는 뜻밖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이야기라면 독자는 비극적인 사건이나 절망의 순간부터 시작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김애란은 가장 평범한 생활의 한 장면을 내세운다. '도배를 하자'는 말은 집을 새롭게 꾸미자는 제안처럼 들리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것은 아이를 잃은 뒤 더 이상 이전과 같을 수 없는 집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가를 묻는 질문으로 바뀐다.〈입동〉은 사고 자체를 재현하는 소설이 아니다. 이미 지나간 사건 이후, 남겨진 사람들이 같은 집 안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과정을 조용히 따라간다. 그래서 이 작품의 중심에는 아이의 죽음보다 집.. 2026. 7. 20.
켄 리우 『종이 동물원』 거대한 세계는 어떻게 종이 한 장 안으로 접히는가 좋은 소설은 거대한 이야기를 크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작은 이야기 속에 거대한 세계를 접어 넣는다. 전쟁은 한 사람의 상처로, 시대는 한 가족의 식탁으로, 역사는 아이와 엄마의 대화로 모습을 바꾼다. 독자는 한 가족의 평범한 일상을 읽고 있는데도 어느새 한 시대의 아픔과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은 바로 그런 작품이다. 겉으로 보면 이 소설은 엄마가 종이 동물을 접어 아들과 놀아 주는 이야기다. 사건도 크지 않고 등장인물도 많지 않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독자는 단순히 한 가족의 이야기를 읽었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 이민과 언어, 정체성과 차별, 부모와 자식의 사랑이라는 거대한 질문들이 마음속에 오래 남는다.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켄 리우는 .. 2026. 7. 19.
레이먼드 카버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사건은 어떻게 관계를 바꾸고 하나의 서사가 되는가 우리는 흔히 소설은 사건으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살인이나 사고, 사랑과 이별처럼 특별한 일이 벌어져야 이야기가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줄거리를 이야기할 때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부터 설명한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좋은 소설은 사건을 기록하는 장르가 아니라, 사건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흔드는가를 탐구하는 장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는 이를 가장 조용하면서도 강렬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줄거리만 요약하면 단순하다. 여덟 살 생일을 맞은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끝내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작품을 덮고 난 뒤 독자의 마음에 오래 남는 것은 사고 장면도, 죽음의 순간도 아니다. 한밤중 제과점에서 갓 구운 빵.. 2026. 7.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