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의독서11 앨리스 먼로 『거지 소녀』②|좋은 소설은 시간을 어떻게 기억으로 바꾸는가 들어가는 말|시간은 사라지지만 기억은 이야기가 된다 사람은 시간을 순서대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몇 년을 함께 보낸 일보다 단 하루의 풍경이 더 오래 남기도하고, 오래전 들었던 한마디가 수십 년이 지나도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기도 합니다. 우리의 기억은 연대기가 아니라, 삶을 바꾸었던 몇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앨리스 먼로는 이 기억의 방식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 작가입니다. 『거지 소녀』 연작 가운데 「장엄한 매질」과 「스펠링」은 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작품입니다. 한 편은 어린 로즈가 폭력과 사랑이 뒤섞인 세계를 처음 배우는 이야기이고, 다른 한 편은 늙고 쇠락한 플로를 돌보며 같은 세계를 다시 바라보는 이야기입니다. 두 작품 사이에는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르지만, 먼로는 그 시간을 거의 .. 2026. 7. 24. 앨리스 먼로 『거지 소녀』①|평범한 삶은 어떻게 위대한 소설이 되는가 들어가는 말 / 왜 우리는 로즈를 오래 기억하게 될까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라고 해서 모두 어렵거나 거대한 사건을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앨리스 먼로의 소설은 놀라울 만큼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출발합니다. 작은 마을에서 자란 한 소녀, 가족 사이의 불편한 침묵, 오래전 지나간 수치심, 차마 다 말하지 못한 사랑과 미움. 다른 작가였다면 몇 줄로 지나쳤을 일상이 먼로의 소설에서는 한 사람의 인생을 이루는 결정적인 순간이 됩니다.그래서 처음 『거지 소녀』를 읽으면 다소 의아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눈을 사로잡는 극적인 사건이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줄거리로 빠르게 달려가는 장편도 아닙니다. 서로 다른 단편들이 흩어져 있을 뿐인데, 책장을 덮고 나면 마치 로즈라는 한 사람의 삶 전체를 오랫동.. 2026. 7. 23. 켄 리우 『종이 동물원』 거대한 세계는 어떻게 종이 한 장 안으로 접히는가 좋은 소설은 거대한 이야기를 크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작은 이야기 속에 거대한 세계를 접어 넣는다. 전쟁은 한 사람의 상처로, 시대는 한 가족의 식탁으로, 역사는 아이와 엄마의 대화로 모습을 바꾼다. 독자는 한 가족의 평범한 일상을 읽고 있는데도 어느새 한 시대의 아픔과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은 바로 그런 작품이다. 겉으로 보면 이 소설은 엄마가 종이 동물을 접어 아들과 놀아 주는 이야기다. 사건도 크지 않고 등장인물도 많지 않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독자는 단순히 한 가족의 이야기를 읽었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 이민과 언어, 정체성과 차별, 부모와 자식의 사랑이라는 거대한 질문들이 마음속에 오래 남는다.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켄 리우는 .. 2026. 7. 19. 레이먼드 카버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사건은 어떻게 관계를 바꾸고 하나의 서사가 되는가 우리는 흔히 소설은 사건으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살인이나 사고, 사랑과 이별처럼 특별한 일이 벌어져야 이야기가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줄거리를 이야기할 때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부터 설명한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좋은 소설은 사건을 기록하는 장르가 아니라, 사건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흔드는가를 탐구하는 장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는 이를 가장 조용하면서도 강렬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줄거리만 요약하면 단순하다. 여덟 살 생일을 맞은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끝내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작품을 덮고 난 뒤 독자의 마음에 오래 남는 것은 사고 장면도, 죽음의 순간도 아니다. 한밤중 제과점에서 갓 구운 빵.. 2026. 7. 19. 김훈 작가의 문장은 왜 오래 남을까 / 좋은 문장은 무엇을 덜어낼지 안다 1. 좋은 문장은 더하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는 것이다 좋은 문장을 쓰려면 무엇을 더해야 할까. 화려한 표현일까, 어려운 단어일까, 아니면 독자를 놀라게 하는 비유일까.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고민을 한다. 하지만 김훈의 문장을 읽다 보면 정반대의 답을 만나게 된다. 좋은 문장은 무엇을 더할지가 아니라, 무엇을 덜어낼지를 아는 문장이라는 사실이다.김훈의 소설과 산문에는 불필요한 말이 거의 없다. 감정을 크게 설명하지도 않고, 화려한 수식어를 늘어놓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문장은 오래 남는다. 짧고 단단한 문장 하나가 독자의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울린다. 이것이 바로 많은 독자가 김훈의 문장을 '아름답다'기보다 '묵직하다'라고 말하는 이유일 것이다.대표작 『칼의 노래』를 읽으면 이런 특.. 2026. 7. 16. 왜 어떤 주인공은 평생 잊히지 않을까|좋은 소설 속 인물의 비밀 1. 우리는 줄거리보다 사람을 기억한다어린 시절 읽었던 소설의 줄거리를 모두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 사건의 순서도 흐릿해지고, 결말마저 가물가물해진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잊히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주인공이다.누군가는 『어린 왕자』를 떠올리면 금발 소년의 순수한 눈빛이 먼저 생각나고, 『데미안』을 읽은 사람은 여전히 싱클레어와 데미안을 기억한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덮은 뒤에도 독자의 마음속에 오래 남는 것은 줄거리보다 영혜라는 인물이다. 작품은 끝났지만 인물은 독자의 기억 속에서 계속 살아간다.왜 어떤 주인공은 평생 잊히지 않을까. 좋은 소설은 사건이 특별해서 오래 남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 있기 때문에 오래 남는다. 독자는 사건을 따라 책장을 넘기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 2026. 7. 15.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