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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사유

뜨거움 속에서 익어 가는 것들

by 들꽃 2026. 9. 7.

 

요즘 같은 불볕더위에도 여름 밭에서는 열매가 익어 간다.

텃밭에는 토마토와 수박, 참외, 옥수수, 고추, 고구마를 비롯해 오이와 가지까지 심어 놓았다. 처음 모종을 심을 때만 해도 ‘이것을 언제 키워 먹나?’ 싶었는데, 두어 달이 지나자 잎 사이로 열매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노란색과 붉은색으로 익어가는 텃밭 방울토마토
뜨거운 여름을 지나며 토마토도 저마다의 빛깔로 익어 간다.

초록 일색이던 밭에 붉은색과 노란색이 조금씩 번진다. 토마토가 붉어지고 참외가 노랗게 익는다. 수박은 처음부터 끝까지 푸른 얼굴이라 언제 속이 익었는지 겉만 봐서는 알기 어렵다.

그런 열매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까지 넉넉해진다.

한낮에는 밭에 서 있기조차 힘들다. 이른 새벽에 잠시 풀을 뽑거나 물을 주는 것만으로도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린다. 해가 조금만 높이 떠도 얼른 그늘을 찾게 된다.

그런데 식물들은 하루 종일 그 자리에 서 있다.

피할 그늘도 없는 밭에서 잎을 펼치고 뜨거운 햇볕을 받아낸다. 그렇게 토마토는 붉어지고, 참외에는 단맛이 들고, 수박 속도 천천히 여문다.

내가 피하고 싶은 뜨거움이 저들에게는 익어 가는 시간이 된다.

수박을 여러 해 심어 보았지만 올해처럼 큰 수박을 수확한 것은 처음이다.

내 머리통만 한 수박이 신기해서 밭에 갈 때마다 보고 또 보았다. 가느다란 줄기 하나에 어떻게 저렇게 크고 무거운 것이 매달려 있을 수 있을까. 손으로 두드려 보기도 하고 꼭지가 마르는지도 들여다보며 수확할 날을 기다렸다.

큰 수박을 기다리는 동안 주먹만 한 애플수박을 먼저 땄다. 크기는 작아도 칼을 대니 빨간 속살이 드러났다. 한입 베어 물자 제법 달았다.

텃밭에서 직접 키워 수확한 수박과 잘라 본 붉은 수박 속
여러 해 수박을 심었지만 올해처럼 큰 수박을 수확한 것은 처음이다.

요즘은 그렇게 매일 한두 개씩 익은 열매를 따다가 식탁에 올린다.

노란색과 붉은색으로 익어가는 텃밭 방울토마토
뜨거운 여름을 지나며 토마토도 저마다의 빛깔로 익어 간다.

 

내가 한 일이라고 해봐야 모종을 심고, 가끔 물을 주고, 풀을 뽑아준 것뿐이다. 그사이 비가 내렸고 햇볕이 비쳤다.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는 뿌리가 물과 양분을 찾아 쉼 없이 뻗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한 일보다 받은 것이 훨씬 많다.

그래서 밭에서 따온 열매는 단순한 수확물이라기보다 선물처럼 느껴진다. 몇 개는 가족과 나누고, 잘 익은 것은 함께 잘라 먹는다. 내가 키웠다고 생색내기에는 햇볕과 비와 흙이 한 일이 너무 많다.

작은 씨앗 하나가 땅에 묻혀 뿌리를 내리고 뜨거운 계절을 지나 열매가 된다.

그 열매를 우리가 먹는다.

그리고 먹고 남은 열매 속에는 또 씨앗이 들어 있다.

한해살이 식물은 한 계절을 살고 사라지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끝나는 것만은 아니다. 한 포기가 여러 개의 씨앗을 남기고, 그 씨앗은 다시 다음 계절을 기다린다.

밭을 가꾸면서 이런 단순한 사실이 새삼스럽게 보일 때가 있다.

사람에게도 견뎌야 하는 계절이 있다.

지나고 있을 때는 왜 이런 시간이 필요한지 알 수 없고, 그저 빨리 끝났으면 싶은 날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그때 내가 조금 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모든 뜨거움이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견딘다고 언제나 보상이 돌아오는 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오늘 밭에서 수박 하나를 안고 들어오며 생각했다.

뜨거운 햇볕을 피할 수도 없었던 저 작은 모종이 어느새 두 팔로 안아야 할 만큼 묵직한 열매를 만들었다.

무엇이 익고 있는지는 익기 전에는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나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뜨거운 계절을 여러 번 지나왔다.

그 시간들이 내 안에 무엇을 남겼는지는 아직 다 알지 못한다.

오늘 저녁에는 잘 익은 수박을 잘라 식탁에 올려야겠다.

붉은 수박 한 조각을 가족에게 건네는 것.

어쩌면 지금 내게 필요한 열매는 그 정도면 충분한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