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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의 독서

엄마의 시간. 치매 엄마와 뜨개질이 다시 시작된 날

by 들꽃 2023. 7. 17.

다시 시작된 뜨개질

엄마가 뜨개질을 시작하셨다.

길이가 한 자쯤 되는 대바늘을 들고 무언가를 열심히 뜨신다.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 손의 뜨개질감은 조금씩 늘어가고, 양귀비꽃처럼 붉은 털실 뭉치는 천천히 작아진다.

무얼 뜨시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웃으며 말씀하신다.

“나도 몰라. 뜨다 보면 조끼든 스웨터든 뭐가 되겠지.”

그 말이 그럴듯해서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머니가 문제였다.

주머니를 달려면 어느 순간 코를 내어야 하는데, 그게 제법 복잡한 계산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한참을 끙끙거리며 계산하시다가 결국 말씀하셨다.

“아이고, 안 되겠다. 주머니 없이 해야지.”

수십 년이 지나도 손은 뜨개질을 기억하고 있는데, 머리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괜찮아, 엄마. 요즘은 주머니 없어도 돼.”

나는 괜히 맞장구를 쳐 드렸다.

엄마가 줄여 온 시간

엄마가 뜨개질하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그러니까 4~50년 전만 해도 엄마는 참 많이 뜨셨다. 오 남매의 스웨터며 조끼, 목도리, 벙어리장갑까지 수도 없이 만들어 주셨다.

엄마 솜씨는 참 좋았다.

엄마가 떠 준 스웨터를 입고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만져보며 부러워했고, 선생님도 칭찬하셨다. 나는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곤 했다.

문제는 엄마의 시간이었다.

낮에는 집안일을 혼자 도맡아 하시고, 코텍이라는 담배회사에서 교대근무까지 하셨다. 그 두 가지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랄 텐데, 밤이면 다시 뜨개질을 시작하셨다.

결국 줄일 수 있는 건 잠뿐이었다.

하루에 서너 시간 잘까 말까 하며 종종걸음으로 가족을 돌보고 아이들을 키워내셨다.

지금 돌아보면 말단 공무원의 넉넉하지 않은 월급으로 할아버지와 오 남매, 여덟 식구가 큰 탈 없이 살아낼 수 있었던 건 엄마의 억척스러운 희생 덕분이었다.

여든둘에 머문 엄마

몇 년 전부터 엄마는 치매를 앓으셨다.

기억은 조금씩 흐려졌고, 방금 한 일은 물론 당신 나이마저 잊곤 하셨다.

“내가 올해 몇이니?”

“엄마, 여든아홉.”

“어? 내가 여든아홉이여? 여든둘 아니니?”

엄마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질문을 하셨다. 그때마다 낯선 자신의 나이에 놀라셨다.

“아이고, 이제 죽을 때가 됐구먼.”

“엄마, 요즘은 아흔이 보통이야. 아버지도 아흔넷까지 사셨잖아.”

왜 유독 여든둘에 마음이 머물렀을까.

혹시 그 무렵부터 기억이 조금씩 멈추기 시작한 걸까. 가끔은 그냥 엄마 나이를 여든둘이라고 말해 버릴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런 엄마가 오랜만에 다시 뜨개질을 시작하셨다.

골똘히 손을 움직이며 집중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치매에도 도움이 되겠거니 했고, 무엇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의 슬픔을 조금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뜨개질을 시작하고는 아버지 이야기에 눈물을 보태는 날이 조금 줄어들었다.

손끝도 따뜻해지는 것 같았고, 가끔은 기억도 아주 조금 돌아오는 듯했다.

엄마의 시간

뜬금없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혹시 엄마가 다시 젊어지는 건 아닐까.

마음속 나이인 여든둘을 지나, 뜨개질을 가장 열심히 하시던 40대의 엄마로.

그렇게만 된다면 친구처럼 여행도 다니고, 배 깔고 누워 엄마가 해주는 밥도 받아먹고 싶었다.

“너는 다 큰 년이 손도 까딱 안 하고 받아만 먹냐.”

엄마의 잔소리를 양념 삼아서.

그때는 웃으며 그런 상상을 했다.

이제는 그 시간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래도 가끔 붉은 털실만 보면 대바늘을 들고 앉아 계시던 엄마가 떠오른다.

손은 기억하고 있었던 시간들.

어쩌면 엄마의 시간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서 천천히 뜨개질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