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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의 독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무엇이든 가능하다』차 한 잔이 한 사람의 삶을 열어젖히는 순간 - 「도터의 민박집」과 「선물」을 중심으로

by 들꽃 2026. 6. 30.

               

1. 스트라우트는 인물을 설명하지 않는다. 인물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기다린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읽으며 가장 놀라운 점은 인물을 대하는 태도이다. 대부분의 소설은 독자가 인물을 이해하지 못할까 봐 끊임없이 설명한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어떤 상처를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후회하는지 친절하게 알려 준다. 그러나 스트라우트는 정반대다. 그는 독자에게 설명하기보다 인물을 오랫동안 바라보게 한다.       

「선물」에서 에이블은 동생 도티를 떠올리지만, 그 순간조차 자신의 감정을 분석하지 않는다. 그는 미안하다고도, 후회한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오래전 기억을 따라간다. 그리고 독자는 그 기억의 결을 따라가며 에이블이라는 사람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은 실제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이해할 때 그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설명해서 이해하는 경우보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행동과 표정을 통해 이해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스트라우트는 바로 그 현실의 방식을 소설 속에 옮겨 놓는다.

문예창작에서 흔히 '보여주기(showing)''말해주기(telling)'를 구분한다. 그러나 스트라우트의 작품을 읽으며 느낀 것은, 그는 단순히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독자가 인물을 이해할 시간을 확보해 준다. 그것이 이 소설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이다.


 

도티의 민박 집 단편 소설 첫 페이지의 줄 친 부분 이미지

 

2. 도티는 상처를 가진 인물이 아니라, 상처를 견디는 방식이 다른 사람이다.

 

도티를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참 외로운 사람이다.'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사람은 오래전부터 혼자 견디는 법을 배운 사람이구나.'였다.

스트라우트는 도티를 불행한 인물로 소비하지 않는다. 그의 삶에는 분명 상처가 있다. 하지만 그 상처를 소설의 중심 사건으로 확대하지 않는다. 대신 그 상처가 도티의 말투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조용한 일상을 어떻게 살아가게 했는지를 보여 준다.

이것이 스트라우트 인물의 특징이다.

많은 작가들이 과거의 사건으로 현재를 설명한다. 어린 시절의 가난, 부모의 폭력, 실패한 사랑이 현재의 성격을 결정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스트라우트는 과거를 원인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을 먼저 보여 주고, 독자가 그 사람의 과거를 조금씩 짐작하게 만든다.

그래서 도티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존재하는 사람'이 된다.

문학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인물을 하나의 의미로 환원하는 일이다. '가난한 사람', '상처 입은 사람', '착한 사람'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순간 인물은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기능이 되어 버린다. 스트라우트는 끝까지 그 유혹을 거부한다. 도티는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그의 전부는 아니다. 때로는 유머를 잃지 않고, 때로는 타인을 배려하며, 때로는 스스로를 지켜 내는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독자는 도티를 이해하기보다 만나게 된다.

3. '차 한 잔'은 위로가 아니라, 관계를 다시 시작하는 언어다.

가장 오래 눈길이 머문 부분은 '차 한 잔'이었다.

처음 읽을 때는 그 장면이 평범하게 지나갔다. 하지만 다시 읽어 보니 스트라우트는 아주 의도적으로 '차'를 선택하고 있었다.

차는 사건이 아니다.

갈등도 아니다.

반전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그 장면은 소설 전체에서 가장 따뜻한 온도를 가지고 있다.

왜일까.

차를 함께 마신다는 것은 상대를 설득하는 일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일도 아니다.

다만 '당신 곁에 잠시 머물겠다.'는 가장 조용한 표현이다.

스트라우트는 이 평범한 행위를 통해 인물들 사이에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을 아주 조금 열어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그 장면에서도 작가는 감동을 만들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누구도 삶이 바뀌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변화는 아주 작다. 그러나 인간의 관계는 원래 그렇게 조금씩 움직인다.

나는 이 장면을 읽으며 좋은 소설은 거대한 사건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상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다시 배웠다.

창작을 하다 보면 우리는 자꾸 특별한 장면을 만들려고 한다. 예상치 못한 반전, 강렬한 고백, 극적인 화해를 준비한다.

하지만 스트라우트는 말없이 차를 내어놓는 장면 하나로도 인물의 관계를 바꾼다.

결국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사건의 크기가 아니라, 그 장면이 얼마나 인물다운가 하는 문제라는 것을 이 작품은 조용히 가르쳐 준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스의 무엇이든 가능하다 책 뒷 표지 이미지
뒷 표지